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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斷想

등록일 : 2010-07-27 조회 :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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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斷想
가을에는 티끌 한 점 없이 푸르게 채색된 하늘도, 온통 붉게 타 들어가며 가슴앓이하는 단풍숲도, 서늘한 바람 한 줄기에도 응답하는 쓸쓸한 억새밭도 그대로 한 장의 편지지이다.
가을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마주하게 되는 추수를 앞둔 논밭의 풍성함은 고향을 찾을 때마다 이것저것 가득 보따리짐 싸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연상시키고, 추수를 마친 빈 논의 허허로움은 한평생 일과 더불어 사셨던 아버지의 굽은 등을 떠올리게 한다.
해야할 일들 속에 파묻혀 사노라면 더러 계절의 변화를 뒤늦게 절감하곤 하지만 언제나 가을만은 항상 한 걸음 앞서 내 가슴을 물들여 놓고는 소리 없이 성큼 다가오곤 한다.
공자(孔子)는 내 나이 오십을 일컫어 ‘ 지천명(知天命) ’이라 하였다. 자연스럽게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가며 닮게 되는 때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늘이라도 가릴 듯한 기상으로 푸르게 펼쳐있던 잎새들이 낙엽 되어 우수수 떨어지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던 한여름 태양이 서편 하늘을 온통 벌겋게 울려놓고 사라지는, 그러한 시간과 자연의 순리를 시나브로 체득하게 된다는 말일 터인데, 그러나 나는 아직도 때때로 허허롭고 수시로 삶의 참모습을 찾아 헤매이게 된다. 이 가을에는...
가을의 결실과 수확은 여름철 거친 비바람과 작열하는 폭염을 허리 굽은 땀방울과 순한 눈빛으로 감내한 땅지킴이들의 애씀에 대한 흔적이며 보상이다.
삶의 열매를 수확해야 할 인새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나 또한,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된다. 그것들은 저만치 흘러 가버린 강물처럼 퍼뜩 나를 스쳐갔지만, 어느새 돌아보면 새하얀 눈밭의 또록한 발자국처럼 고스란히 내 뒤를 뒤따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나온 삶 못지 않게 발 딛고 서 있는 오늘과 어느새 다가와 찰나(刹那)로 사라져 갈 내일의 시간들 속에서 챙기고 건져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회사의 책임자로서, 이러저러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모습들도 추스려 본다.
땅 속 줄기마다 토실하게 영글어 있을 살찐 고구마 같은 내 삶의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은 조금 더 미루어둬야겠다.
다만 내게 주어질 삶을 살아가는 동안 더 많이 그리워하고, 더 먼저 사랑하고, 더 크게 나누며 살아가고 싶은 변함없는 인생의 소망을 다진다.
삶이란 결코 말로 대신되어질 수 없는 것임에, 이 깊어가는 가을의 한 자락에 서서 나는 또 다시 진정한 지혜를 위해 침묵으로 기도한다.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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