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가지 마중물로
우선 오늘 이 황송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1200년 역사와 전통으로 한국불교의 요람이 된 범어사 대성 스님, 흥교 큰스님, 정관 스님, 혜총스님, 정각 스님, 조연 스님을 비롯한 여러 대중스님들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그리고 저의 수상 소식을 들으시고 축하해 주시기 위해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자리해 주신 여러분들께 송구한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제가 이렇게 격려를 받을 만큼 두드러지게 한 일이 없는데, 너무 과분한 상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고향인 여수를 떠나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 이제는 부산이 고향이 되어 가족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지역유지 어른분들, 그리고 선후배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의 격려와 사랑이 있었고 그것이 힘이 되어 오늘의 영광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펌프로 물을 길어 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때 펌프질을 하기 전에 물 한 바가지를 펌프 위 구멍에 들이붓고 부지런히 펌프질을 하면 이내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 한 바가지의 물이 땅 속에 머물러 있던 물을 마중가서 데려온다 하여 ‘마중물’이라고 한답니다.
지난 주 국민훈장을 전수받은 후로 며칠간 제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어제와 다름없이 내일도 지켜나가야 할 제 몫의 노릇이 과연 무엇인지, 무엇으로 인해 제가 이토록 영광스러운 추억을 가질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굳이 저의 자리매김을 하자면 아마 그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제 역할인 것 같습니다.
실로 어렵게 자란 어린시절부터 저는 제 성공한 인생의 노후에는 아내와 함께 돈 보따리를 차에 가득 싣고 다니며 어려운 사람들 집 마루에 몰래 던져놓고 다니며 살아가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저는 법정스님과 범어사와의 소중한 인연을 계기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가를 조금은 알게 되었고 그 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쳤던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생활하시는 독거어른이나 고단한 삶에 지쳐 정신마저 놓아버린 치매어른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생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소년소녀가장들, 학비가 부족해 진학의 꿈을 포기하려는 학생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급한 상황에서 수술비가 없어 고통받는 어린아이들에까지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들의 서글프고 눈물겨운 모습이 마냥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고, 선행을 실천한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없이 그저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제 마음의 소리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들을 이 자리에 계신 설동근 교육감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서 뜻 깊게 평가해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고, 열매를 거둬들이기엔 이른 때인 것 같습니다.
급변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 속에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한 분 한 분의 작은 정성들이 지금보다 더 왕성하고 꾸준히 모인다면 한 바가지 마중물보다 더 넉넉하고 향기로운 물길이 샘솟아 하나의 큰 강을 이루고,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름다운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실질적인 선행(善行)을 통해서만 마음을 맑힐 수 있다는 진리에 따라 힘닿는 데까지 어려운 이웃들,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 인생의 흔들림없는 나침반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쉼없이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떠나온 고향, 그리고 살고 있는 고향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며 예의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가진 것 넉넉지 않아도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의 손길을 내밀고 나눔을 행할 줄 아는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변함없이, 더욱 가까이 함께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남들은 가지 않으려는 외진 길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와 함께 걸어가 주시는 맑고 향기롭게 가족과 범어사 가족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또한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매일 같이 기도하고, 묵묵히 뒷바라지 해준 저의 아내, 사업한다는 구실로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도 못했는데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자식들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움의 마음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의 따뜻한 축하의 눈빛과 덕담을 더 많은 나눔을 실천해 나가고자 하는 제 기도 속에 깊이 새겨 놓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4 국민훈장 수훈 기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