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지 입니다.

글마당
  • CEO 칼럼
  • 에세이
  • 메일보내기

에세이

HOME > 글마당 > 에세이

출근길 단상(斷想)

등록일 : 2009-07-04 조회 : 1,724
게시물 등록정보
댓글수0
둑 아래로 냇물이 흐르고 좁은 길 좌우로 백일홍 나무가 주욱 늘어 서 있다.
7월 하순부터 피기 시작한 백일홍이 그 이름처럼 9월 초순인 여태까지 선명한 색깔을 뽐내며 나의 출근길을 맞아준다.
8월의 더위에 짓눌려 생기를 잃을 법도 하지만 파란 잎사귀 사이로 내밀고 있는 꽃의 아름다운 자태는 자연만이 가질 수 있는 오묘한 생명력이 아닌가 싶다.
나는 매일 아침 이 백일홍 꽃길을 따라 출근을 한다.
넓게 쭉 뻗은 큰 길이 좀 더 빠르고 편리하지만, 그 소음과 번잡함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울퉁불퉁 굽고 좁은 시골길을 더 좋아한다.
시골 촌놈의 티가 몸에 베어있는 까닭도 있겠지만 정서적으로 호젓함이나 고즈넉함을 즐기는 성향이 이 출근길을 자주 택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둑 아래로 흐르는 오염된 물은 제 빛을 잃은 듯 보이지만 바다나 호수, 강을 흐르는 물소리는 마음에 안정과 고요, 희망을 주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자칫 경직되려는 나의 정서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에 나는 오늘도 이 백일홍 길을 달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좀 더 시간이 지나 백일홍 꽃잎지고 잎사귀마저 떨어지면 한동안 출근길이 쓸쓸하겠지만 내년에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올 백일홍과 약속을 걸기 위해 잠시 길가에 멈춰섰다.
9월이다. 참 좋은 계절로 들어섰다.
오늘은 9월이 주는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해본다.
9월은 한여름의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고, 한 해의 수확을 위한 준비하는 달이며, 많이 가진 사람이나 덜 가진 사람 구별없이 모두가 넉넉하고 여유로운 달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있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들녘의 황금빛 물결과 온갖 곡식, 계절 과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여 먹지 않아도 배부른 듯 넉넉함을 채워주는 계절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전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다.
시대의 변화가 원인이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기본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과연 국민을 위한 집단인지 많이 헛갈린다.
부정과 부패를 일삼고, 심지어는 국민을 볼모로 그들 개인과 정당의 이익을 위해 거짓조차 정당화시키는 가증스러움을 보면 그들이 과연 양식이 있는 사람들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매일 같이 느끼는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목소리가 크고 주먹이 세면 만사 제쳐두고 최고이고 이혼, 신용카드 부채, 파산, 살인, 파괴, 도둑질 등 신문과 방송은 끊임없이 불쾌한 뉴스를 경쟁적으로 토해내 이제 웬만한 사건 사고에는 무감각해진 지 오래다.
법과 질서가 붕괴되어 정의와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보 취급받는 세상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남을 속이는 재주들 또한 탁월해지고 있나 보다.
본인이 살고 있는 집도 자기 모르게 위조되어 타인에게 넘어 갔다는 보도는 차마 웃지도 못할 일이다.
부동산으로 벼락돈 벌어들인 사람들의 한탕주의가 오늘날 사회를 병들게 했다.
그들이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리 매김한 지도 오래다.
그들은 온갖 정경유착의 원죄자이며 사회의 부도덕한 환경을 조성한 자들이다.
그러한 그들이 이 땅에서 존경받는 현실이 부끄럽고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사회의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비판하고 성토한다.
여럿이 모이면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큰소리로 비판하지만 누구하나 비판을 실천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 사는 사회의 정서가 혼란스러워서인지 하늘의 기상도 제 역할은 잃고 날씨마저도 시절을 잃어버렸다.
지금쯤이면 들녘의 곡식이랑 과일이 탐스러워야하는데 너무 잦은 비로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하니 과일도 곡식도 설익어 맛이 들지 않는다.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의 부풀은 설렘은 좀처럼 느껴지질 않는다.
좋은 사회는 우리가 맘놓고 풍요로움을 느끼며 행복을 누리고 살 수 있는 곳이다.
비도 햇볕도 바람도 일상에 필요한 만큼의 양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일확천금을 학수고대하는 헛된 기도소리 말고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농부의 기도, 노를 젓느라 구부린 사공의 참다운 기도 소리가 그립다.

2003년 9월
목록보기
1